‘Your Mileage May Vary’는 독자들의 도덕적 dilemma를 깊이 있게 다루는 조언 칼럼입니다. 이 칼럼은 ‘가치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하는데요. 이는 각 개인이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가 때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번 주에는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전달되었습니다. 내용은 간추리고 편집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룬 모든 위대한 업적, 이야기, 심지어 한 잔의 커피조차 다른 생명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종의 존재 자체가 자연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뻔히 드러나는데, 어떻게 눈을 마주치고 살아가야 할까요? 이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이 우리를 낳아준 대가를 갚는다는 뜻인데, 그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의욕이 없습니다. 이 sounds가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숫자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소비자’를 창조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계는 이미 파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중독에 사로잡힌 humanity는 스스로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류 혐오자’에게 보내는 답변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혐오, 분노, 경멸 이면에는 softer한 감정들이 숨어 있습니다. 실망, 슬픔,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를 vulnerable하게 만들기에, 우리는 종종 이를 bypass하고 분노로 직행합니다. 스스로를 판단하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지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surprising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류를 향해 ‘yuck’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기원전 17세기)에는 인류에 대한 혐오를 신들에게 투영했습니다. 신들이 우리를 끔찍히 여겨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상상은,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인류 혐오주의는 끊임없이 부활해 왔습니다.

특히 문명-scale의 재앙이 닥쳤을 때면, 인류 혐오주의는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 17세기 종교전쟁, 20세기 핵시대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kini, 인류가 초래한 기후 위기 속에서 ‘인류 종말론’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파괴적인 Homo sapiens의 종말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죠.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음으로써 인류의 종말을 촉진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출처: V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