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컴퓨터가 가정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당시 많은 가정에서는 컴퓨터를 위한 전용 공간, 이른바 ‘컴퓨터방’을 마련했다. 그러나 필자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지하실 한쪽에 두 대의 데스크톱을 놓아두고, 그 존재를 집안 다른 공간에서 최대한 감추었다. 학교에 가지 못할 때면 몰래 지하실로 내려가 도스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 2>의 불법 복사본을 플레이하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대의 컴퓨터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뜨거운 금속 냄새, 먼지, 그리고 마우스패드의 냄새가 섞인 독특한 향이 피어올랐다. 이 냄새를 완벽히 재현한 퍼퓸이 바로 ‘제로(Zero)’다. 프랑스의 향수 브랜드 ‘아가 olfactory’에서 선보인 이 향수는 생태계 붕괴를 주제로 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기술 문명의 흔적과 자연의 소멸을 동시에 담아냈다.

제로의 시리즈는 총 여섯 가지로 구성된다. 각각은 감각적인 플라스틱 냄새, 신선한 빵의 향기, 균류 네트워크의 뮤스크, 그리고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축축한 흙냄새까지 담고 있다. 이 중 제로는 1999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컴퓨터는 개인의 손안에 있지 않았고, 한 곳에 모여 있는 지식의 창구였다. 그 공간은nostalgia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향수를 통해 필자는 DJ 니나지라치(Ninajirachi)의 앨범 를 떠올렸다. 그녀의 음악은 스크린에 금이 간 아이팟 터치 소리와 다이얼업 모뎀, 앵글파이어(AngeFire)上的 애니 팬사이트를 연상시킨다. 제로 또한 이와 같은nostalgic한 감각을 자극하지만,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컴퓨터방의 냄새를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제로의 향기는 먼지와 금속, 고무, 플라스틱 냄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한 번도 청소되지 않은 오래된 델 컴퓨터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듯한 느낌이다. 라텍스와 실리콘, 파우더와 플로랄을 섞은 <고스트 인 더 셸>의 향수와 비교해보면, 제로는 더 순수한 컴퓨터 냄새를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우스패드의 냄새는 fading되지만, 금속과 먼지의 냄새는 피부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처음에는 불쾌할 수 있지만, 점차 이 냄새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컴퓨터방의 냄새는 필자에게는 희망의 냄새였다. 어린 시절의 가능성과 컴퓨터 사용이 필수적이지 않았던 시절, 그리고 기술에 종속되지 않았던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동시에 제로는 인간 종말의 첫 번째 단계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쩌면 필자는 이 향수를 단순히 향수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Warning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Afterm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