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미국에서 ‘로보텍’(Robotech)이란 애니메이션이 등장했을 때, 시청자들은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당시 미국 만화는 대부분 수준 이하였지만, ‘로보텍’은 달랐다. 일본 애니메이션 ‘마크로스’를 각색한 이 작품은 전 우주를 무대로 한 처절한 전쟁, 영웅들의 죽음, 그리고 음악이 지닌 변혁적 힘을 담아냈다. 특히 가와모리 쇼지가 디자인한 로봇 ‘디아클론’이 훗날 ‘트랜스포머’의 원형이 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로보텍’이 미국 애니메이션계에 남긴 획기적인 족적은 가와모리 쇼지의 창작력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가 40년 만에 내놓은 첫 장편 영화 ‘라비린스’가 공개됐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대를 모았던 만큼이나 아쉬움을 동시에 안기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만든 분신, 그리고 함정
‘라비린스’는 소셜 미디어의 과도한 노출이 불러온 분열된 자아를 그린 SF 스토리다. 주인공 시오리 마에자와(스즈카)는 인기 있는 친구 키라라(아이토)와 함께 춤 영상을 촬영하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키라라는 이를 편집해 영상을 업로드했고, 시오리는 온라인상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시오리의 폰이 스스로 깨지면서 그녀는 휴대폰 내부에 갇히고 만다. 그곳은 텅 빈 디지털 공간으로, 무의미한 스티커들만이 가득한 절망의 세계였다.
더 큰 문제는 시오리의 분신이 현실 세계로 빠져나왔다는 점이다. ‘Shiori@Revolution’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분신은 화려한 머리색을 뽐내며 인기 스타로 활동 중이다. 이 분신이 1억 개의 ‘좋아요’를 모으면, 진짜 시오리는 영원히 사라지고 분신이 진짜가 된다. 시오리는 스티커로 전락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기발한 설정, 그러나 부족한 완성도
‘라비린스’는 소셜 미디어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과도한 자기 노출이 초래하는 자아 분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대인의 고뇌를 섬뜩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작품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스토리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캐릭터들의 내면 묘사도 얕아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후반부의 전개는 다소 산만해지면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라비린스’는 SF적 상상력과 현대 사회 비판을 조화시키려 했지만, 그 균형이 완벽하지 않다. 가와모리 쇼지의 전작들처럼 ‘라비린스’도 기술적 혁신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추구했지만, 결과물은 일관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결론: 혁신의 시도, 그러나 미완의 작품
‘라비린스’는 소셜 미디어가 초래한 현대인의 고뇌를 그린 흥미로운 시도다. 그러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가와모리 쇼지의 전작들처럼 이 작품도 기술적 혁신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추구했지만, 결과물은 일관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관객들은 그의 새로운 시도에 주목하겠지만, 아쉬운 점도 함께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