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이전의 미국 사회: 분열과 이상

미국 독립전쟁 이전부터 미국 사회는 당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다. 존 애덤스는 혁명 당시 인구의 '3분의 1은 혁명에 반대했고, 3분의 1은 지지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중립적이었다'고 기록했다.[i] 그러나 독립을 주도한 이상주의자들은 이러한 분열을 넘어 '시민적 우정'(civic friendship)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 개념은 식민지 시대부터 지역과 식민지 의회에서 실천되어 온 전통이었다.

메이플라워 협약과 시민적 평등의 시작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순례자들은 '공동체를 위한 질서와 보존을 위해 시민적 단체를 결성한다'는 메이플라워 협약을 맺었다.[ii] 이들은 미래의 사회를 건설하기 전에 공동체의 bonds(결속)을 먼저 형성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관계를 '유용한 우정'(friendship of utility)으로 설명했는데, 시민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결합하고 조화를 이루며 도시(폴리스)와 fellow citizens(동포)를 위한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개념이었다.[iii] 즉, 시민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통치와 피통치를 번갈아 맡아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호주의를 실천했다. 이러한 상호주의가 시민적 평등의 조건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우정론

시민적 우정은 통치와 피통치를 번갈아 맡는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시민들은 각자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평등한 관계를 형성한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과 사회의 역할

1세기 반 후, 토머스 페인은 「상식」에서 사회가 '사랑의 결합을 통해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했다.[iv] 페인에게 사회는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시민적 단결의 감정을 창출하는 근원이었다. 1770년대 중반까지 자치정부가 공동체의 통일성과 공유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 있는 정치체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이_INTOLERABLE ACTS(강제법)을 시행하면서 이러한 자치정부와 상호주의가 무너졌다.

영국의 강제법과 시민적 우정의 붕괴

1774년 영국은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매사추세츠에 강제법을 적용했다. 이는 자치정부의 상실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인들을 통치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적 우정은 통치와 피통치를 번갈아 맡는 상호주의에 기반했다. 그러나 영국이 직접 통치를 시행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불가능해졌다. 시민적 우정의 토대인 상호주의와 공정성이 사라졌고, 양측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해졌다.

170년 이상의 공통 문화와 긴밀한 사회·경제적 유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매사추세츠에 직접 개입하면서 시민적 우정의 근본 조건인 상호주의와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각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독립을 제외하고는 해결할 수 없는 시민적 딜레마였다. 독립은 단순히 정치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시민적 우정의 회복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의미: beyond 정치체제의 전환

독립선언서는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선언한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적 우정의 이상을 재확인하고, 상호주의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을 통해 시민적 우정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복잡했고,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이상은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은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 Reason